에르푸르트
| 에르푸르트 Erfurt | |||||
|---|---|---|---|---|---|
에르푸르트 대성당과 성 세베리 교회 | |||||
| |||||
| 행정 | |||||
| 국가 | |||||
| 행정 구역 | 튀링겐주 | ||||
| 지리 | |||||
| 면적 | 269.17 km2 | ||||
| 해발 | 194 m | ||||
| 인문 | |||||
| 인구 | 210,118명(2015년) | ||||
| 인구 밀도 | 780명/km2 | ||||
| 지역 부호 | |||||
| 우편번호 | 99084-99099 | ||||
| 지역번호 | 0361 | ||||
| 웹사이트 | 에르푸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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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푸르트(독일어: Erfurt)는 독일 튀링겐주의 주도다. 라이프치히에서 남서쪽 100km, 카셀의 남동쪽 113km, 하노버에서 남동쪽 180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에르푸르트 공항까지 뮌헨을 거쳐 갈 수 있다.
역사
[편집]고대와 중세
[편집]480년경에 투링기족이 에르푸르트에 정착했다고 전해지며 500년경에 튀링겐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 뒤 742년 문헌에서 '에르페스푸르트'(Erphesfurt)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 해에 로마 가톨릭교회 성인인 보니파시오가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독일 중부에 3개의 교구(나머지 2곳은 뷔르츠부르크, 뷔라부르크)를 세웠으며 그 중 하나가 "오랫동안 이교도들이 거주해 온 에르페스푸르트"라고 알렸다. 3개의 교구는 모두 다음 해에 교황 자카리아에 의해 공인되었지만 755년에 마인츠 교구에 편입되었다. 그곳이 이미 인구가 많았다는 사실은 6세기와 7세기의 23기의 무덤과 6기의 말 매장지를 포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입증되었다.
중세 내내 에르푸르트는 게라강을 건너는 여울목 근처에 위치해 있어 중요한 무역 도시로 여겨졌다. 에르푸르트는 튀링겐 지방에 위치한 대청 재배 마을인 고타, 텐슈테트, 아른슈타트, 랑겐잘차와 함께 독일 대청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로 인해 그 도시들은 매우 부유해졌다. 에르푸르트는 중요한 무역로가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비아 레기아(Via Regia)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잇는 동서 방향의 가장 많이 이용되는 도로 중 하나였으며(프랑크푸르트암마인, 에르푸르트, 라이프치히, 브로츠와프를 경유함) 남북 방향의 또 다른 경로는 뤼베크와 같은 발트해 항구들과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강력한 이탈리아 상위 도시국가들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10세기와 11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마인츠 선제후국은 에르푸르트에서 몇 가지 특권을 누렸다. 독일 왕들은 페터스베르크 언덕에 중요한 수도원을 두었고 마인츠 대주교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 1100년경에는 몇몇 주민들이 연간 '프라이친스'(Freizins, 해방세)를 납부함으로써 자유 시민이 되었는데 이는 독립 도시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12세기 동안에 점점 더 커져가는 독립의 상징으로 시민들은 에르푸르트(오늘날의 유리-가가린-링(Juri-Gagarin-Ring) 지역)에 성벽을 쌓았다. 1200년 이후 독립이 완성되었고 1217년에 시의회가 설립되었으며, 시청은 1275년에 지어졌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의회는 에어푸르트 주변의 시 소유 영지를 매입했는데 이 영지는 전성기 때 거의 100개의 마을과 성, 심지어 또 다른 작은 마을(죄메르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에르푸르트는 서쪽의 튀링겐 영지, 동쪽의 작센 선제후국 사이에서 중요한 지역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1306년부터 1481년 사이에 에르푸르트는 튀링겐 도시 동맹의 두 주요 도시인 뮐하우젠과 노르트하우젠과 동맹을 맺었으며 1430년에는 3개 도시가 함께 한자 동맹에 가입했다. 15세기에 인구가 20,000명에 달하며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된 경제 발전의 정점에 도달했다. 1432년부터 1446년 사이에 2번째이자 더 높은 성벽이 세워졌다. 1483년에 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치리악스부르크(Cyriaksburg) 언덕에 최초의 도시 요새가 세워졌다.
1184년에 에르푸르트에서는 에르푸르트 변소 사고(Erfurter Latrinensturz)라는 유명한 사고가 발생했다.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신하인 마인츠 대주교인 콘라트 1세와 튀링겐 영주인 루트비히 3세 사이의 평화 협상을 위해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회의를 열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바닥이 견디지 못했고 결국 무너졌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십 명이 아래 변소 구덩이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지만 루트비히 3세, 콘라트 1세, 그리고 하인리히 6세는 현장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에르푸르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11세기에 세워졌다.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의 유대인 공동체들과 함께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구 시나고그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으며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고 크레머브뤼케(Krämerbrücke) 근처 게라강에 있는 미크바도 마찬가지이다. 1349년 유럽 전역에서 페스트로 인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던 시기에 에르푸르트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었고 100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나머지는 도시에서 쫓겨났다. 박해 이전에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 자신의 집 지하실에 재산을 묻었다. 1998년에 이 보물이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오늘날 회당 전시회에는 다양한 금과 은으로 된 물건들이 포함된 에르푸르트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1349년 이후에는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2번째 공동체를 세웠으나 1454년에 시의회에 의해 해산되었다. 중세 유대인 공동체의 삶에 대한 뛰어난 증언 덕분에 에르푸르트의 유대인 유적지는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1379년에 에르푸르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대학교는 쾰른 대학교와 함께 독일에서 최초의 시 소유 대학 중 하나였으며 보통은 '란데스헤어'(Landesherr)라고 부르는 영주가 소유하고 있었다. 이 오래된 대학의 일부 건물들은 북부 도심의 '라틴 지구'에 남아 있거나 복원되어 있다(예를 들어 콜레기움 마이우스(Collegium Maius), 학생 기숙사인 '게오르겐부르제'(Georgenburse), 그리고 대학교 산하 병원과 교회가 있음). 이 대학은 울리히 폰 후텐, 헬리우스 에오바누스 헤수스, 유스투스 요나스 같은 학자들과 함께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 독일 문화 생활의 중심지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근세 초반
[편집]1501년에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로 이주하여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1505년 이후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사(수도사)로 살았다. 1507년에는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11년에 비텐베르크로 영구 이주했다. 에르푸르트는 1521년에 개신교 종교개혁을 조기에 수용한 도시였다.
1530년 이 도시는 하멜부르크 조약을 통해 유럽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 양대 종파(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인정한 최초의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지위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는 에르푸르트의 완만한 경제적 쇠퇴를 가져왔다. 무역이 축소되고 인구가 감소했으며 대학은 영향력을 잃었다. 도시의 독립성이 위협받았다. 1664년 도시와 주변 지역은 마인츠 선제후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도시는 독립성을 상실했다. 마인츠 선제후국은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1665년에서 1726년 사이에 페터스베르크 언덕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고 에르푸르트를 통치할 총독을 임명했다.
1682년과 1683년에 에르푸르트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페스트 유행을 겪었다. 1683년에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에르푸르트에서는 1526년부터 1700년까지 마녀사냥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 마녀재판에 대한 18건의 기록이 남아 있다.
18세기 후반 동안 에르푸르트는 또 다른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했다. 카를 테오도르 안톤 마리아 폰 달베르크 총독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빌헬름 폰 훔볼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들은 에르푸르트에 있는 그의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편집]에르푸르트는 1802년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는 프로이센이 라인강 좌안(서쪽 연안)에서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보상받기 위함이었다. 1806년 10월 16일 에르푸르트 항복 사건 당시 오라니에-나사우 공작 빌헬름 6세 휘하의 12,000명의 프로이센 및 작센 수비대, 65문의 대포, 페터스베르크 요새와 치리아크스부르크 요새가 프랑스군에 넘겨졌다. 항복 당시 프랑스 원수 조아섕 뮈라는 에르푸르트 인근에 약 16,000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블랑켄하인의 작센-바이마르 영토가 병합되면서 이 도시는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직속의 '황제 직할령'으로서 에르푸르트 공국이 되어 프랑스 제1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주변의 튀링겐 국가들이 가입했던 라인 동맹과는 분리되었다. 에르푸르트는 프랑스 총독 산하의 민정 및 군정 상원(에르푸르트 재무 및 영지 회계국)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집무실은 이전에 선제후국 시절 도시 총독의 처소였던 쿠어마인츠 총독 관저에 두었다. 나폴레옹은 1807년 7월 23일 이 공국을 처음 방문하여 요새와 방어 시설을 시찰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도시를 방문한 가운데 에르푸르트 회담이 개최되었다.
프랑스 행정부는 통치 기간 동안 가로등을 도입하고 도로 표면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산 말에 세금을 부과했다. 페터스 교회(성 페터 교회)는 프랑스 점령하에 수난을 겪었는데 파이프오르간, 종, 심지어 성체 성혈 대성당(프론라이히남스카펠레)의 탑을 포함한 교회의 비품들이 다른 지역 교회에 경매로 팔려나갔고 옛 수도원의 도서관은 에르푸르트 대학에 기증되었다(이후 1816년 대학교가 폐쇄될 때 보이네부르크 도서관으로 이전됨). 이와 유사하게 치리아크스부르크 요새도 프랑스군에 의해 훼손되었는데 수녀원의 가상 보물을 찾느라 도시 쪽 성벽이 부분적으로 철거되었고 인부들의 임금은 건축 자재를 매각한 대금으로 지급되었다.
1811년 황태자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나무와 석고로 만든 21m 높이의 기념탑(나폴레옹 탑)이 공공 광장에 세워졌다. 마찬가지로 슈티거발트 숲에는 방패, 칼, 창을 든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상이 꼭대기에 있고 프리드리히 뢸이 조각한 나폴레옹의 흉상이 안치된 그리스 양식의 신전인 '나폴레옹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여기에는 페터스 교회에서 가져온 큰 연못을 이용한 분수와 화단이 있는 동굴이 포함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치스러운 축제가 끝난 후 1811년 8월 14일에 낙성식을 가졌고 1812년에는 루이 슈포어가 지휘하는 프레디거 교회에서의 콘서트와 함께 이 축제가 재현되었다.
프랑스가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이후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1813년 2월 24일 나폴레옹은 페터스베르크 요새에 공성전 대비를 명령했고 4월 25일 도시를 방문하여 방어 시설, 특히 두 요새를 시찰했다. 1813년 7월 10일에 나폴레옹은 제국의 남작인 알렉상드르 달통에게 에르푸르트의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프랑스가 대육군(Grande Armée)에 1,000명의 남성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7월 19일 신병들과 다른 시민들이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20명이 체포되어 그중 2명이 프랑스 군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모든 여관과 주점의 폐쇄를 명령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일~10월 19일)에서 제6차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지 일주일 만에 에르푸르트는 프로이센 중장 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1813년 12월 20일 달통이 1차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프랑스군은 페터스베르크와 치리아크스부르크 두 요새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동맹군은 1814년 1월 6일 환호하는 환영을 받으며 에르푸르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프랑스 통치하에서 시민들이 겪은 억압의 상징이었던 나폴레옹 탑은 불타서 파괴되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언덕도 1813년 11월 1일에 불탔으며 1814년 에르푸르트 시민들과 포위군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사흘 후 자원입대 소집이 있자 300명의 에르푸르트 시민들이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군에 합류했다. 마침내 1814년 5월에 프랑스는 완전히 항복했고 1,700명의 프랑스군이 페터스베르크와 치리아크스부르크 요새를 비우고 물러났다. 두 달 반 동안의 포위 공격 기간 동안 도시의 사망률은 크게 증가했다. 1813년 에르푸르트 시민 1,564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전년도보다 약 1,000명 더 많은 수치였다.
빈 회의 이후 에르푸르트는 1815년 6월 21일 프로이센에 반환되어 새로운 작센주의 3개 관구(행정 지구) 중 하나의 수도가 되었으나 에르푸르트 영토의 일부 남부 및 동부 지역은 블랑켄하인과 함께 이듬해 9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으로 이양되었다. 비록 서쪽, 남쪽, 동쪽이 튀링겐 영토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 도시는 1944년까지 프로이센의 작센주 일부로 남았다.
1815년 이후
[편집]1848년 혁명 이후 많은 독일인은 통일된 민족 국가를 갖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하나의 시도가 1850년에 실패로 끝난 독일 국가들의 '에르푸르트 연합'이었다. 산업 혁명은 1840년대에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를 연결하는 튀링겐 철도가 건설되면서 에르푸르트에 도달했다. 이후 수년 동안 다양한 부문에서 많은 공장이 설립되었다. 가장 큰 공장 중 하나는 1862년에 세워진 '프로이센 왕립 총기 공장'이었다. 1871년 독일의 통일 이후에 에르푸르트는 프로이센의 남쪽 국경에서 독일의 중심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도시의 방어 시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1873년 도시 방어 시설의 철거는 에르푸르트의 건설 붐으로 이어졌는데 이전에는 성벽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과 그 너머에 건물을 짓는 것이 이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공공 및 민간 건물이 생겨났고 인프라(노면 전차, 병원, 학교 등)가 빠르게 개선되었다. 주민 수는 1870년경 40,000명에서 1914년 130,000명으로 증가했으며 도시는 모든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1891년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대회 기간 동안에 에르푸르트 강령이 채택되었다.
양차 대전 사이에 도시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복지 정책에 따라 주택 부족 문제는 주택 건설 프로그램으로 해결되었고 사회적 인프라가 확대되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의 대공황은 에르푸르트에 재앙을 가져왔으며 주민 3명 중 거의 1명이 실업자가 되었다. 극좌향과 극우향 환경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고 많은 주민이 새로운 나치 독일 정부와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했다. 다른 이들, 특히 일부 공산주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행정부에 저항했다. 1938년 수정의 밤 동안 새로운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이민을 떠나거나 (많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1914년에 토프 앤 선즈(Topf and Sons) 회사는 화장터 제조업을 시작하여 나중에 이 업계의 시장 선두 주자가 되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J.A. 토프 앤 선즈는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특별히 개발된 화장터, 오븐 및 관련 설비를 공급했다. 2011년 1월 27일에 에르푸르트에 있는 옛 회사 부지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관과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르푸르트는 27회 이상의 영국군과 미국군의 공습을 겪었으며 약 1,6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석유 캠페인 목표물로 폭격을 맞았지만 에르푸르트는 제한적인 피해만을 입었고 1945년 4월 12일 미군 제80보병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7월 3일 미군이 도시를 떠났고 이 도시는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가 되었으며 결국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토가 되었다. 1948년 에르푸르트는 바이마르를 대신하여 튀링겐주의 주도가 되었다. 1952년 동독의 주 제도는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하의 중앙 집권화를 위해 해체되었다. 에르푸르트는 이후 새로운 '베치르크(구/지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3년에는 사범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 1954년에는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1816년 대학이 폐쇄된 이후 에르푸르트에 세워진 최초의 학술 기관들이었다.
1970년 3월 19일 동독과 서독의 정부 수반인 빌리 슈토프와 빌리 브란트가 에르푸르트에서 만났는데 이는 독일 분단 이후 최초의 만남이었다. 1970년대와 1880년대에 동독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도심의 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퇴락한 반면 정부는 주변부에 대규모 플라텐바우(조립식 아파트) 정착지를 건설함으로써 주택 부족과 싸웠다.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있었던 평화 혁명은 독일의 재통일로 이어졌다.
1990년에 튀링겐주가 재창설되면서 이 도시는 주도가 되었다. 독일의 재통일 이후 동독 지역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고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옛 서독 지역으로 이주했다. 동시에 많은 건물이 재개발되었고 인프라가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1991년 전문대학(Fachhochschule)이 문을 연 데 이어 1994년에는 새로운 대학이 개교했다. 2005년과 2008년 사이에 실업률이 감소하고 새로운 기업들이 발전하면서 경제 상황이 호전되었다. 또한 인구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2년 4월 26일에 구텐베르크 김나지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1990년대 이후 조직범죄가 에르푸르트에 발을 붙였으며 아르메니아 마피아를 포함한 여러 마피아 집단이 도시에 존재하고 있다. 다른 사건들 중에서도 외식업 부문을 표적으로 한 강도 및 방화 공격이 있었고 2014년에는 탁 트인 도로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구
[편집]| 연도 | 인구 | ±% |
|---|---|---|
| 1493 | 18,680 | — |
| 1620 | 19,000 | +1.7% |
| 1632 | 13,000 | −31.6% |
| 1710 | 14,338 | +10.3% |
| 1802 | 16,938 | +18.1% |
| 1817 | 14,846 | −12.4% |
| 1871 | 43,616 | +193.8% |
| 1900 | 85,202 | +95.3% |
| 1910 | 111,463 | +30.8% |
| 1925 | 136,555 | +22.5% |
| 1933 | 146,270 | +7.1% |
| 1939 | 165,615 | +13.2% |
| 1951 | 190,487 | +15.0% |
| 1961 | 186,369 | −2.2% |
| 1971 | 198,265 | +6.4% |
| 1976 | 205,483 | +3.6% |
| 1981 | 212,012 | +3.2% |
| 1986 | 217,134 | +2.4% |
| 1991 | 204,912 | −5.6% |
| 1996 | 208,179 | +1.6% |
| 2001 | 200,126 | −3.9% |
| 2006 | 202,658 | +1.3% |
| 2011 | 206,384 | +1.8% |
| 2016 | 211,113 | +2.3% |
| 2019 | 213,981 | +1.4% |
| Population size may be affected by changes in administrative divisions. | ||
기후
[편집]| 에르푸르트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공항)의 기후 자료 | |||||||||||||
|---|---|---|---|---|---|---|---|---|---|---|---|---|---|
|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역대 최고 기온 °C (°F) | 15.8 (60.4) |
19.0 (66.2) |
24.2 (75.6) |
29.6 (85.3) |
31.4 (88.5) |
35.9 (96.6) |
37.6 (99.7) |
36.3 (97.3) |
31.6 (88.9) |
26.6 (79.9) |
20.8 (69.4) |
17.4 (63.3) |
37.6 (99.7) |
| 일평균 최고 기온 °C (°F) | 2.7 (36.9) |
4.1 (39.4) |
8.4 (47.1) |
13.8 (56.8) |
17.7 (63.9) |
21.1 (70.0) |
23.6 (74.5) |
23.6 (74.5) |
18.7 (65.7) |
13.1 (55.6) |
7.2 (45.0) |
3.6 (38.5) |
13.1 (55.6) |
| 일일 평균 기온 °C (°F) | 0.2 (32.4) |
0.9 (33.6) |
4.3 (39.7) |
8.8 (47.8) |
12.9 (55.2) |
16.1 (61.0) |
18.3 (64.9) |
18.1 (64.6) |
13.8 (56.8) |
9.1 (48.4) |
4.4 (39.9) |
1.2 (34.2) |
9.0 (48.2) |
| 일평균 최저 기온 °C (°F) | −2.5 (27.5) |
−2.3 (27.9) |
0.3 (32.5) |
3.5 (38.3) |
7.4 (45.3) |
10.8 (51.4) |
12.8 (55.0) |
12.7 (54.9) |
9.1 (48.4) |
5.4 (41.7) |
1.6 (34.9) |
−1.4 (29.5) |
4.8 (40.6) |
| 역대 최저 기온 °C (°F) | −25.0 (−13.0) |
−24.6 (−12.3) |
−20.2 (−4.4) |
−10.4 (13.3) |
−2.9 (26.8) |
0.0 (32.0) |
3.3 (37.9) |
3.8 (38.8) |
−0.6 (30.9) |
−7.6 (18.3) |
−18.6 (−1.5) |
−23.5 (−10.3) |
−25.0 (−13.0) |
| 평균 강수량 mm (인치) | 25.0 (0.98) |
22.9 (0.90) |
36.3 (1.43) |
34.2 (1.35) |
63.9 (2.52) |
55.7 (2.19) |
80.8 (3.18) |
58.7 (2.31) |
45.8 (1.80) |
37.6 (1.48) |
41.1 (1.62) |
32.6 (1.28) |
534.7 (21.05) |
| 평균 강수일수 (≥ 0.1 mm) | 15.0 | 13.1 | 14.8 | 11.8 | 13.8 | 13.2 | 14.9 | 13.0 | 12.0 | 13.9 | 14.3 | 15.3 | 165.0 |
| 평균 강설일수 (≥ 1.0 cm) | 11.7 | 9.5 | 4.3 | 0.3 | 0 | 0 | 0 | 0 | 0 | 0.2 | 2.0 | 7.3 | 35.4 |
| 평균 상대 습도 (%) | 85.7 | 82.4 | 77.7 | 70.7 | 72.1 | 72.4 | 70.1 | 69.2 | 76.2 | 82.8 | 87.0 | 87.2 | 77.8 |
| 평균 월간 일조시간 | 59.7 | 80.6 | 128.7 | 184.8 | 211.9 | 219.8 | 224.7 | 210.4 | 159.3 | 112.4 | 60.7 | 47.0 | 1,706.5 |
| 출처 1: 미국 해양대기청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951년~현재)[1] | |||||||||||||
| 출처 2: Infoclimat[2] | |||||||||||||
자매 도시
[편집]각주
[편집]- ↑ “Erfurt-Weimar Climate Normals 1991–2020”. 미국 해양대기청. 2023년 9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9월 16일에 확인함.
- ↑ “Normales et climatologiques 1991-2020 à Erfurt-Bindersleben” (프랑스어). Infoclimat. 2023년 10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10월 27일에 확인함.
